99년에 서울로 왔다. 

잔뜩 촌스러움이 묻어 있는 20대 중반의 나는 당시 닷컴의 흥행과 함께 가장 핫하다는 강남역으로 출근을 했고,

매일 같이 이어지던 야근 속에서 몇 달 째 집과 회사만 무한 반복하던 차였다.


발이 붕 뜬 채로 사람들에게 밀려 열차에 타면 그 자세로 강남역까지 실려 가야 했던 그 때.

강남역을 걸어 회사로 가면서 너무 외롭고, 무섭고,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당시 내 생활 반경 안에는 '산'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니! 산으로 둘러싸인 부산에서 올라온 나에게 그 것은 놀라움 이었고, 두려움이었다. 그 날 나는 길에서 울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에 내려 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부산 역 앞에서 잡아탄 택시 아저씨가 '오랜만에 부산에 왔으면 산복도로로 달리자'고 하셨고, 그렇게 산복도로를 달려 집으로 가는데 놀라고 말았다. 마치 도시가 크리스마스 트리 같지 않은가?!


물론 서울도 산이 있고, 아니 더 험준한 산이 있고, 산을 깎아 만든 드라이브 통로가 있지만.

생활 속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생활권과는 살짝 벗어나 감상하듯 바라봐야하는 야경이 아니라, 부산의 산복도로는 내가 트리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기분.



그래서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산복도로를 이용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차, 지난 설에 본 감천마을은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까 기대감을 안겨주었고,

아이를 떼어 놓고 혼자 갈 수 없는 처지라 사진으로 본 야경은 그야말로 365일 크리스마스.


아름답다. 그리고 싶다. 라는 충동이 늘상 마음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난 화가가 아니니까. 퇴근 후 찔끔찔끔 연습장에 펜을 끄적였다.



총 2일, 그림 그린 시간으로는 약 2시간 30분을 소요하여 완성한 '감천마을'

밑그림 없이 그냥 펜을 잡고 그려나갔다. (낙서는 밑그림 따윈 없는 겁니다. ㅎ)

가는 촉의 피그먼트펜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5mm 두꺼운 펜으로 촘촘히 채워 나간 감천마을.


비록 흑백이지만 이 그림을 보며 낮엔 파아란 물탱크를 밤엔 반짝이는 야경을 떠올린다. 



부산에서는 오히려 가장 낮은 평지에 살았지만, 서울에서는 산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 

그래도 달과 가장 가까운 마을은 가장 아름다운 색을 빛낸다. 



벌써 그린 지 한 달이 되어가는 그림. 

잠깐이지만 그리는 동안 행복했다. 창을 열고 거주중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아.


다음은 어디를 그릴까?

시간 여유는 있는데, 마음의 여유는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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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방전 직전 퇴근하는 직장인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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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 지하철공사가 끝나가면서 몇 년간 가려졌던 공사막이 걷어졌다.
갑갑한 벽이 사라진 너른 평지엔 인공물 대신 잡초가 가득.
월급공장으로 출근하는 암울한 길이 바람에 살랑이는 잡초들을 보며 걷는 산책길이 되었다.
누군가에겐 잡초며, 비싼땅을 무단점거한 쓸모없는 생명이겠지만...
또 자연에게는 버려지도 잊혀졌던 시간이 축복.
생명을 잡초와 화초로,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나눌 권한이 인간에게 있었던가!
곧 파헤쳐질 이 풀들과 난 매일매일 시한부 사랑을 나누고 있다.

-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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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에 적응하라.
인격은 성공의 밑천이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성취될 때
성공을 이룰 수 있다.


-  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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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4일.

로즈데이라고 꽃다발을 든 남자들이 간간이 보이는 강남역으로의 외출.

7:30분 강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간 과학기술회관 대강당은 인파로 넘실거렸다.


작년 유영만교수님 출판기념 강연 이후 거의 1년 만인가?

7시 10여분. 다들 저녁도 못먹고 달려왔을 텐데, 이미 만원 인파.

휴넷의 힘인지 아니면 강연자의 힘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활기와 기대감으로 가득찬 강연장은 나에게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준다.



현장에서 나눠준 간단한 강사 프로필.

강사 : 박웅현 TBWA ECD

그 아래로 경력사항에 내가 잘 아는 광고와 카피들이 빼꼼히 채워져 있다.



7시 30분.

코리안타임 이런 것 없이 칼같이 시작하는 강연. 

여성 사회자분의 간단한 소개에 이어 예의 그 뿔테 안경과 모자를 쓰고 등장한 박웅현 ECD에게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소리가 들린다.


간단히 신간소개 부터 시작했는데, 신간은 중요한 8단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①자존 ②본질 ③고전(classic) ④見 ⑤현재 ⑥소통 ⑦권위 ⑧인생


이 여덟가지가 모두 중요하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하고, 또 오늘 강연의 주제가 되는 것이 바로

見 이라고 하였다.

창의력에 있어 見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오늘 말해주시겠다고 한다.


창의성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어제 내린 눈"과 같다. 어제 창의적이었던 것은 오늘의 창의는 되지 못한다는 뜻.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인게 삶이라, 주변에 있는 것을 세심하세 바라보는 것에서 부터 창의는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팀장이란 사람, 아니 창의적인 사람은 말한 사람 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말의 가치를 찾아내는 사람으로, 일상의 말 한 마디에 늘 예민하고 촉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아르키메데스도, 뉴턴도 갑작스럽게 인류에 기록될만한 창의를 발휘한 것이 아니라, 늘 생각하고 고민의 촉을 채우는 가운데 그 임계점(비등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런 창의적인 발상이 가능한 거였다.


언젠가 경험했던 모든 것이 바로 창의성이며, 이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바로 "눈"이다.

이를 통해 박ECD는 많은 광고를 만들어 냈는데, 그 광고들의 공통점은 바로 '일상'이었다.




그리하여 박ECD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나온

視而不見

聽而不聞 을 다시 꺼냈다.

보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만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창의성이 나오지 못한다.

앞 자만 떼서, 시청만 하면 창의성을 찾을 수 없다.

바로 견문을 해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보기 시작해야 보이고, 제대로 듣기 시작해야 들린다는 뜻.




생활속에서 제대로 보는 것은 바로 행복이다.

그리고 창의력은 일상속에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책을 읽고,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데 이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어야 겠다란 컴플렉스를 가지게 된다.


이런 컴플렉스는 벗어나서

好學深思 心知其意(즐겁게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아는 것)을 기억하자.

라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어쩌면 내가 여기 적은 강연내용은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와 '책은 도끼다'에서 거듭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내용들일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예로 보여주며 뒷 이야기를 설명해주신다거나, 또 시와 그림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책에서 받지 못한 감동을 다시금 받게 되었다.


그런 세세한 이야기 까지 다 적어버리면 강연에 참석한 사람과의 경계가 없어지므로, 그런 것들은 나의 추억으로 삼고...


오늘 박웅현ECD가 예를 들어준 많은 것들 중, 기억에 남는 詩 한 편을 끝으로 후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인 안도현, "스며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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